오해는 아프다. 가진 사람이나 받은 사람이나 그렇다. 아파서 그런지 오해로 묶여진 매듭은 풀기가 무척 어렵다. 서서히 풀어가노라면 다시 뜻밖의 상황이 닥쳐 매듭은 다시 꽉 조여진다. 새로 엉키기도 한다. 사람들이 망상 없이 생각이 유연하다면 그럴 일이 없다. 오해는 사람이란 베베 꼬인 동물이란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의 일이다. 잘못된 생각은 왜 하는 것일까.
피해망상에서 오는 걸까. 나를 위협하려는 의도를 조금이라도 생각해볼 수 있는 행동은 오해를 하게 되는 건가. 진화 심리학자들은 아마도 인간이 생존을 위해 오해하도록 진화해왔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며칠 전, 난처하게 오해를 받으니 계속 오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오해란 우리에게 어떤 것일까? 말했듯이 위협을 감지하는데 적응적인 기능을 하기 위해서 만든 의심하는 것이 망상으로 치달아 오해라는 것을 탄생시킨 걸까? 단순히 인간을 생존의 위협에 둘러싸인 존재로 보면 그럴듯하다. 그런데 몇 차원 더 생각해보면 오해란 새로운 일을 만들기도 한다. 오해를 하며 갈등이 생기고 증폭되어 큰 문제를 만든다. 그러다 파국으로 치닫는 이야기가 있고, 절정의 순간에 모든 오해가 풀려 반전을 맞기도 한다. 드라마가 그렇게 갈등의 극을 달리고, 일상은 덜한 편이다. 하지만 오해는 갈등의 정체로 마찬가지로 멈춰 있을 수 있다. 갈등의 주체들이 더 이상 접촉을 하지 않는다면 그렇다.
나는 내가 받은 오해를 풀기가 두렵고 귀찮다. 처음에는 두려웠으나 지금은 귀찮은 게 더 커졌다. 내가 보이기만 해도 인상을 찌푸리며 목소리부터 바뀌는 사람은 만나기도 싫다. 제멋대로 오해해 화를 내는 사람에게 내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은 너무 소모적이다. 며칠이나 몇 주 뒤면 보지도 않을 것이고, 나에게 아무런 이득이나 손해 가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상관없다는 이유도 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세상에 생긴다는 점 탓에 처음엔 속이 탔지만 지금은 귀찮다. 뭐 어쩌겠나 싶다. 사람은 잘하든 못하든 여러가지 이유로 욕을 먹는다. 마치 군대에서 겪었던 것과 같이. 그렇게 생각하니 오해를 놔둘 수 있게 됐다. 다만 잘못된 오해를 가진 그 사람이 나에 대한 헛소문을 퍼뜨리진 말았으면 한다. 그런 소문이 여러 입으로 닿기에 그 사람이 너무나 나와 관계망이 적은 사람이라 크게 걱정되지는 않는다.
쓰다 보니 '오해는 아프다'라는 제목과는 다른 내용이 되었다. 아픈 것은 낫는 것처럼 오해도 마찬가지인가 보다.